
리플리증후군을 가진 주인공이 스스로 만든 허구의 삶 안에서 허우적거리다 결국 구원의 손을 잡는가 싶더니, 그 손마저 거짓으로 물드는 결말. 영화 '거짓말'을 보고 나서 저는 한동안 멍하니 있었습니다. 단순한 사기꾼 이야기가 아니라, 거짓이 어떻게 사랑마저 오염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리플리증후군, 아영은 왜 멈추지 못했나
영화의 주인공 아영은 리플리증후군(Ripley Syndrome)을 가진 인물로 그려집니다. 리플리증후군이란 자신이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를 실제라고 믿으며, 그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상습적으로 거짓 행동을 반복하는 인격장애를 말합니다. 정신의학계에서는 이를 허언증의 일종으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단순한 거짓말과 달리 본인 스스로도 그 허구에 깊이 빠져든다는 점에서 더 복잡한 심리 구조를 가집니다.
저는 현직에 있을 때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실제로 마주한 적이 있습니다. 사기나 허위 신고로 조사를 받으러 온 분들 중에는, 자신이 한 말이 거짓인 줄 알면서도 스스로 그 이야기를 완전히 믿어버린 분들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상황을 모면하려고 던진 한마디가, 어느 순간부터는 자기 자신도 그것이 진짜라고 느끼는 단계까지 가더군요.
아영이 고급 아파트의 비밀번호를 알아내고 마치 자기 집처럼 그 안을 거닐던 장면이 유독 오래 기억에 남는 건 그 이유입니다. 그 순간 아영은 명백히 범죄를 저지르고 있지만, 그녀의 눈빛은 범죄자라기보다 오래 꿈꿔온 일상을 처음으로 맛보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거짓과 현실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 그것이 리플리증후군의 가장 위험한 단계입니다.
국내 정신건강 연구에 따르면, 허언증 또는 병적 거짓말(Pathological Lying)을 반복하는 이들은 단순한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자존감 결핍, 애착 불안, 환경적 박탈 등 복합적인 요인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국립정신건강센터). 아영의 알코올 의존 언니, 집에 들어오지 않는 형부, 재혼한 뒤 딸을 외면하는 어머니. 영화는 아영이 왜 그렇게 됐는지를 조용하지만 치밀하게 설명합니다.
배금주의 사회가 아영을 만들었다
아영을 손가락질하기 쉽습니다. 백화점에서 옷을 훔치고, 살 수도 없는 아파트 매매 상담을 받으러 다니고, 남자친구의 직업을 중학교 교사로 꾸며댔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보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든 건 뭔가?'
배금주의(拜金主義)란 돈과 물질적 豊饒를 인간의 최고 가치로 여기는 태도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얼마짜리 차를 타느냐', '어느 동네에 사느냐'가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영화 속 아영이 직장 동료들 앞에서 "남자친구가 카드를 줬다"며 비싼 밥을 사고, 외제차 매장에 드나들고, 샤넬 제품을 자기 것처럼 건네는 행위는 개인의 허영심이라기보다, 그런 것들로만 사람을 평가하는 집단 안에서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에 가깝습니다.
아영을 그렇게 만든 사회적 구조를 짚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외형적 조건으로 타인을 평가하는 직장 분위기
- 결혼 상대의 직업·재산으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는 관계 문화
- 가난한 연인보다 '그럴싸한 거짓 연인'이 더 환영받는 현실
- 무너진 가족 안에서 아무런 정서적 지지를 받지 못한 성장 환경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한국의 소득 5분위 배율(상위 20%와 하위 20% 간 소득 격차 지수)은 5.59배로, 소득 불평등이 여전히 심각한 수준임을 보여줍니다(출처: 통계청). 이 격차 안에서 아영 같은 처지의 사람이 '보여지는 삶'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 단순히 이상한 일인지 묻고 싶어집니다.
태호의 선택, 사랑인가 공범인가
영화에서 가장 소름 끼치는 장면은 따로 있습니다. 아영이 드디어 진실을 말하겠다고 시댁 식탁 앞에 앉았을 때, 이번에는 태호가 먼저 화려한 거짓말로 아영을 포장해 버립니다. "아버님은 사업하시고, 언니는 형부가 의류 사업을 하고, 동생은 영국 유학 중"이라고요. 그 순간 저는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제가 수사 현장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경우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장면과 겹칩니다. 가해자를 너무 사랑해서, 그 사람의 거짓을 함께 완성해 주는 가족이나 연인들. 그들은 악의가 없습니다. 오히려 선의로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그 선의가 거짓의 공범이 되는 순간, 당사자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게 됩니다.
공범(共犯)이란 법적으로는 범죄 행위를 함께 저지른 사람을 의미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공범은 심리적 공범에 가깝습니다. 쉽게 말해, 거짓 위에 거짓을 덧씌워주는 행위가 결과적으로 그 사람의 거짓 구조 전체를 떠받치게 되는 것입니다. 태호는 아영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의 방식은 결국 아영이 진실과 마주할 기회를 또 한 번 빼앗아 버렸습니다.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텐데, 저는 태호를 순수한 피해자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는 아영의 거짓을 '다 알고 있었다'고 스스로 말했습니다. 알면서 함께 거짓을 완성해준 것이라면, 그것은 사랑의 헌신이 아니라 공동의 도피에 가깝습니다. 아영의 마지막 눈빛이 해방이 아닌 또 다른 추락처럼 느껴졌던 건, 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결말이 던지는 질문, 우리는 누구 편인가
'거짓말'은 아영을 단죄하지 않습니다. 파출소에서 "이제 안 할 수 있어요"라고 결심하는 아영의 목소리는 분명 진심처럼 들렸고, 저도 그 순간만큼은 그녀를 응원했습니다. 그런데 그 진심이 태호의 거짓에 다시 삼켜지는 결말을 보면서, 영화가 묻는 질문이 명확해집니다. '거짓이 전염되는 사회에서, 혼자 진실하게 살아남는 것이 가능한가?'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를 동조 압력(Conformity Pressure)과 연결 짓기도 합니다. 동조 압력이란 집단의 규범이나 기대에 맞추기 위해 개인이 자신의 판단이나 행동을 바꾸는 현상을 말합니다. 아영이 처한 환경—외제차와 고급 아파트로 사람을 평가하는 직장, 물질로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인간관계—은 끊임없이 아영에게 동조 압력을 가했고, 결국 그녀는 그 압력 앞에서 자기 자신을 거짓으로 채워가는 방식을 선택한 것입니다.
~라는 의견도 있지만, 저는 이 영화가 개인의 인격 장애를 소재로 삼으면서도 그 책임을 개인에게만 돌리지 않는다는 점을 높이 삽니다. 아영이라는 인물은 우리 안의 허영심, 타인의 시선에 저당 잡힌 현대인의 자화상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녀를 이상하다고 손가락질하는 순간, 우리는 그 거울에서 눈을 돌리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영화 '거짓말'을 직접 보신다면, 아영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보다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과 사회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관찰해 보시길 권합니다. 태호의 마지막 선택이 과연 사랑이었는지, 그것이 아영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었는지를 생각하다 보면, 영화가 끝난 후에도 한참을 더 붙잡혀 있게 됩니다. 저는 퇴직 후에도 그 막막한 기분을 잊지 못합니다. 진실 앞에 설 용기를 냈음에도 다시 거짓의 늪으로 끌려 들어가는 사람들을, 현장에서도 영화 속에서도 반복해서 보았으니까요.